@zerosept0000000
- 아카아무 전력 120분 “온도” 참가작
- 과거 날조, 아무로 약해보임 주의
아무로 토오루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무르익은 여름인데도 몸이 으슬으슬했다. 최근 들어 당일 결근이 잦은 탓에 전날 밤 베르무트에게 소환당하고도 일을 쉬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오른손을 이마에 대자 뜨뜻한 열이 느껴졌다.
“좋지 못한 걸…….”
“어라, 아무로 씨. 어디 아파요?”
서빙을 마치고 바bar 로 돌아온 카페 포와로의 점원 에노모토 아즈사가 걱정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웃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아까 불 앞에 서 있었더니 땀이 좀 난 것 같아서요.”
거짓에는 늘 일정량의 진실을 섞어야 한다. 포와로의 인기 품목인 햄 샌드위치를 비롯해 음식 메뉴의 재료를 준비하느라 잠깐이지만 불을 쓴 것도 사실, 아마도 오한에 가깝지만 땀이 난 것도 사실이었으니 여기서 거짓이라고는 아프지 않다는 주장 뿐이다.
“혹시라도 힘들면 돌아가요. 어차피 아무로 씨, 자주 빠졌는걸.”
“우와, 아즈사 씨 너무해....”
“후훗, 농담이예요.”
포와로는 시급도 나쁘지 않으면서 결근이나 시프트 교환에 관대했다. 사실은 이쯤에서 일이 생겼다거나, 다른 핑계를 들어 돌아가도 무방할 것이었다. 아무로가 포와로를 떠나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창가에 한 무리의 아이들과 앉아있는 안경 쓴 남자, 오키야 스바루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말없이 그를 노려보자 오키야는 이내 눈치를 채고 아무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무로도 해사한 미소로 화답했다.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견디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삶이었다. 일본 경찰청 경비국 경비기획과 소속 후루야 레이, 혹은 제로, 검은 조직의 정보상 버본, 그리고 명탐정 모리 코고로의 조수이자 카페 포와로의 아르바이트생 아무로 토오루. 어느 이름이든 살아내는 것은 자신이었지만 때에 따라 얼굴과 언어, 그리고 행동을 바꾸어야 했다. 잠입과 위장은 차디찬 늪이었다. 그만 둘 생각도 없었지만, 한 번 발을 들인 이상 그만 둘 수도 없었다.
대의는 거대했고 너무나 멀리 있었다. 후루야 레이는 목 맨 해바라기처럼 먼 곳을 내다보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등 뒤 그늘에서 소리없이 자아가 죽었다. 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선 매일같이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검은 조직이 소멸할 때까지 후루야 또한 세 가지 얼굴을 이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아카이 슈이치는 그런 후루야를 비웃기라도 하듯 온갖 소용돌이에 휘감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 깎은 백단목같은 얼굴을 한 남자는 매사에 무심한 주제에 소름끼치도록 치밀하고 날렵했다. 자신보다 나중에 조직에 들어온 주제에 치고 오르는 속도는 비등했다. 잠입생활의 유일한 숨통이었던 동기가 자살하고, 어느 날 도주한 그가 미 연방수사국 소속 스파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몇 번이고 아카이 슈이치의 이름을 되뇌였다.
라이하 고개에서 키르가 아카이 슈이치를 사살했다는 것을 전해듣고도 후루야 레이는, 아무로 토오루는, 버본은 믿지 않았다. 크게 필요하지 않은 행동임을 알면서도 아카이의 죽음을 조사하고, 화상을 입은 그로 변장해 그의 자취를 맴돌았다. 아카이 슈이치는 숨을 죽인 맹수처럼 살아 있었다. 후루야 레이에게 그것은 필연적인 불행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한 걸음 앞에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촉망받는 인재였던 후루야는 그 사실이 몹시 불쾌했다.
“오늘은 박사님과 함께가 아니네요.”
김이 오르는 커피가 든 포트를 들고 다가간 아무로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책을 읽던 오키야에게 말을 걸었다. 오키야가 안경 너머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예에, 급히 약속이 생기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신 보호자 역할로. 포와로의 햄 샌드위치는 모두 좋아하니까요.”
“그건 감사하군요. 커피의 리필입니다. 방금 내린, 무해한 것이니 부디.”
“이런? 포와로에선 독이 든 커피라도 파나요?”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아무로는 눈매를 접으며 미소를 띠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표정에서 상태가 드러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곁눈질로 오키야 스바루 옆에 앉은 에도가와 코난과 한껏 몸을 움츠린 하이바라 아이, 그리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년 탐정단의 아이들을 한 번 살핀 아무로가 말을 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분이신 것 같아서요, 오키야 씨는.”
공안의 부하들을 뒤로 하고 쿠도 가의 저택에 뛰어든 날, 후루야는 몇 대의 감시카메라 앞에서 아카이 슈이치를 소환할 심산이었다. 오키야 스바루가 거부한다면 자신이 직접 그 변장을 뜯어낼 각오까지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부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미 연방 수사관들의 추적을 붙인 라이하 고개. 아카이 슈이치 본인이 바로 그 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키야 스바루가 아카이 슈이치의 변장이라는 혐의가 벗겨진 것은 아니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후루야 레이는, 아무로 토오루는, 버본은 직감했다. 아카이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베이카 거리를 주시하고 있다고. 그 치밀한 남자가 이 마을을 떠났을 리 없다고. 그리고 하도 로쿠미치의 공연장에서 오키야 스바루가 왼손잡이라는 것을 알고는,
심장이 울렸다.
“아무로 오빠, 어디 아파요?”
적막을 깨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요시다 아유미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아니, 괜찮은데?”
“그런 것치곤... 눈 밑도 거뭇하고 아까부터 땀도 흘리는데요. 아즈사 씨한테는 불 앞에 서 있어서 그렇다고 했지만, 지금 이 카페에 있는 손님 중에 불을 써야하는 메뉴를 주문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걸요. 재료 손질이라면 땀이 날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을 텐데.”
같은 편에 있을 때는 든든한 아군이지만 그렇지 않을 땐 성가시기 짝이 없는 소년, 에도가와 코난이 말했다. 오키야 스바루가 차분하게 아무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꿰뚫을 듯한 눈빛에서 아무로는 아카이 슈이치의 그것을 떠올렸다.
“아아, 듣고 보니 조금 피곤한 것 같기도. 하지만 오늘 퇴근하고 쉬고 나면 괜찮아질거야.”
애써 웃으며 대답하자 갑자기 창밖에서 굉음이 울렸다. 천둥이었다. 더위에 습기가 섞여 구름이 굼뜨다 했더니 장대비의 전초였던 모양이었다. 아무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며칠 간 공안의 서류와 업무 배분에 몰두하고, 어젯밤에는 베르무트의 드라이브를 빙자한 취조에 어울리느라 새벽 늦게서야 집에 돌아왔으며, 오늘 아침엔 간신히 지각을 면한 지라 일기예보를 볼 틈이 없던 그에게 우산이 있을 리 없었다.
걱정어린 표정의 아즈사가 다가왔다.
“꽤 내릴 모양이예요. 라디오에서 방금 긴급 호우주의보가 내렸다고.”
“그런가요. 그러면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가게 문을 닫아야겠네요. 탐정단 여러분은 보호자분들께 연락을. 아즈사 씨, 혹시 포와로에 남는 우산이 있나요?”
“어머, 아무로 씨. 아무로 씨가 우산을 잊다니 별일도 다 있네요.”
“그러게요……"
아무로는 망연자실해져 웃었다. 자기 자신이 못견디게 한심했다.
아무로는 잠든 척 눈을 감고 있었다. 아담한 스바루 360의 조수석이 가시방석이었다. 거센 비가 차체를 때리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듯 같은 곳을 빙빙 돌던 차가 오 분 째 멈춰있었다. 쿠도 저邸에 도착했는지 오키야가 시동을 껐다.
“…저기, 아무로 씨.”
“…….”
대답이 없자 오키야가 조수석으로 손을 뻗었다. 아무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오키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무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수 년간의 스파이 생활 덕에 어쩔 수 없이 인기척에 민감한 몸이었다. 상태가 멀쩡했다면 조금 더 자연스럽게 깨어난 척을 했을텐데. 아무로는 빗물이 죽죽 내리는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쿠도 가의 저택 앞이었다.
“여기는……."
“전에 오신 적이 있죠. 제가 머무는 곳입니다. 곤히 잠드신 것 같아 일단 이쪽으로.”
“아… 네, 감사합니다.”
“…잠깐 실례,”
순간의 틈도 주지 않고 오키야 스바루가 아무로의 이마에 한 손을 얹었다. 남은 한 손은 자기 자신의 이마를 짚은 채였다. 아무로 토오루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뭐 하는…!”
“역시 열이 있네요. 빨리 약을 드시는 게 좋겠어요. 비는 계속 내릴 것 같고, 대중교통도 끊겼고, 약국도 아마 닫았을 게 뻔하고.... 어떠신가요, 오늘 밤 여기서 머무시는 건?”
“……!”
당치도 않는 소리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아카이 슈이치일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결코 자신의 은신처를 알려줄 순 없다. 눈을 감고 있어 한결 나아진 듯 했지만, 여전히 열로 머리가 당겼고 전신이 욱신거렸다. 때마침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콰광——
아무로 토오루는 무겁게 느껴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얼마든지요.”
어쩐지 오키야 스바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있다고 아무로는 생각했다.
깜빡하고 빨래를 내놓았다던 아즈사 씨를 먼저 보내고 아무로는 가게를 정리했다. 코난과 하이바라를 제외한 꼬마 손님들이 부모님과 돌아가고 텅 빈 포와로에 남은 것은 아무로 토오루, 에도가와 코난, 하이바라 아이, 그리고 오키야 스바루 뿐이었다.
“아무로 형은 어쩌려고요? 아까 라디오에서 버스도 전철도 종료되었다고 했는데.”
“글쎄… 모리 탐정님이 사무소에 계셨다면 하룻밤 정도 부탁했겠지만...”
란이 친구들과 여행을 간 동안 모리 코고로는 그토록 사랑하는 경마를 보러 집을 비웠다. 포와로에 남아있던 우산마저 다른 손님들에게 들려보낸 뒤, 아무로는 열이 오른 머리로 당장의 앞날을 도모해야했다.
“담요 정도는 있을테니... 하룻밤 정도 포와로에서 묵는 것도 나쁘진,”
“그 몸 상태로는 안돼요. 상비약도 없다면서요?”
코난의 말처럼 애석하게도 구급상자 속은 텅 비어있었다.
“…제 차로 움직이죠.”
“예?”
뭐라는 거야. 아카이 슈이치인 것 같은 남자에게 따위에게 신세를 질까보냐. 아무로 토오루가 장소를 잊고 미간을 찌푸렸다, 황급히 폈다.
“전철도 끊겼고, 도로가 텅 빈 걸 보니 택시도 잡히지 않을 겁니다. 편하신 곳에 내려 드릴테니 일단은 제 차에 타시죠.”
“그렇게 해요, 아무로 형.”
하지만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점점 어지럼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 아무로는 한 손으로 탁자를 잡았다. 손 끝에 오키야의 시선이 들러붙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럼 중간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호흡을 고르며 앞치마를 벗어두기 위해 탕비실로 돌아오자 코난이 쪼르르 뒤를 따랐다.
“저기… 아무로 형.”
“왜 그러니? 코난 군.”
“오키야 씨는 괜찮아요. 아군이니까 믿어도 돼요.”
벗은 앞치마를 벽에 걸고 아무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뛰어난 추리력과 통찰력을 가진 에도가와 코난이라지만, 꼬마에게까지 경계심을 간파당하다니. 스스로의 바닥을 내보이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래, 알겠어.”
정말로 둘이서 괜찮겠냐고 묻는 코난과 하이바라를 아가사 박사의 연구소에 내려주고, 오키야 스바루는 차로 쿠도 저택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옆자리의 아무로 토오루를 흘긋 바라보았다. 잠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후루야가 여전히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절대 본인의 주소지를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고집스레 감긴 눈매를 보며 오키야 스바루, 아니 아카이 슈이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그를 깨우고, 허물어진 틈을 잡아 열을 재고, 자신의 제안을 수락한 그를 쿠도 저에 들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너무 무모해.’
그 정도의 능력에 지위까지 갖췄으면 적당히 몸을 아껴도 될 법 한데, 그는 늘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무모하게 굴었다. 직접 변장을 하고 조디나 마스미의 주변에 나타난 것. 쿠도 유사쿠 씨가 지키던 저택에 혼자 들어온 것. 대관람차에서 직원으로 변장하고 잠입해선 자신에게 싸움을 건 것. 포와로에서도 몸이 좋지 않으면 그대로 조퇴했으면 좋았을 것을.
공안의 후루야 레이로서, 포와로의 아무로 토오루로서, 그리고 검은 조직의 버본으로서도 그는 자신에 관한 일에 필사적이었다. 점점 심해진 열에도 불구하고 태연을 가장하는 지금도 그러했다.
“저번에 왔을 땐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훌륭한 저택이네요.”
“…네. 덕분에 저도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차에는 우산이 없어, 둘은 저택에 들어오는 잠깐에도 꽤나 젖었다. 1층의 욕실이 딸린 손님방에 아무로를 안내하고 오키야는 서둘러 감기약과 티 세트를 준비했다. 경찰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체력이 뛰어난 그다. 필경 며칠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무색, 무취, 무미의 수면제를 조금 잔에 바르고 응접실에 앉아있자, 얼마 되지 않아 샤워를 마친 아무로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감기약입니다. 새 것이예요.”
오키야는 박스째 새 것인 감기약을 뜯어서 아무로에게 건냈다.
“아삼입니다. 우려낸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잠에 방해가 되진 않을 거예요. 위스키를 넣어드릴까요?”
“버본…이네요.”
“최근엔 버본 일편단심이라서요.”
아무로는 말없이 라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오키야는 먼저 자신의 잔에 홍차를 따르고 버본과 섞어 마셨다. 오키야를 멀거니 바라보던 아무로가 약을 삼키고 차를 따라 마셨다. 그는 버본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많이 바쁘셨나봐요.”
“네, 어쩌다보니.”
달아오른 뺨을 하고 아무로가 배시시 웃었다. 오키야는 천천히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강한 수면제는 아니었지만, 지치고 열이 오른 몸에 샤워까지 한 그에겐 충분할 터였다.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오키야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최근에 시도한 레시피, 재미있게 읽었던 미스터리 소설...... 아무로의 고개가 몇 번을 꾸벅이다 이내 쇼파의 옆으로 쓰러지자 아카이 슈이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읏챠.”
둥글게 웅크린 몸은 따끈하고 묵직했다. 아카이는 조심스레 아무로를 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 달빛마저 그의 잠을 방해하지 못하게 커튼을 꼭꼭 닫고서 아카이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버본은 이마를 덮는 손에 미간을 형편없이 구겼다. 아픈 와중에 잠을 방해하는 접촉이 거슬렸다. 게다가 이 손은 스카치의 것이 아니었다. 스카치의 손은 이것보다 따뜻하고 작았다. 셋이 머무는 세이프 하우스에서 자신과 스카치가 아니라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뭐야.’
‘열이 심하군.’
라이의 체온은 의외로 미지근했다. 붉은 뱀처럼 싸늘하거나 검은 맹수의 그것처럼 뜨거울 줄 알았는데.
‘간호라니...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군요.’
‘내 옆방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꼴을 볼 순 없지.’
‘누가… 이런 걸로 죽는다고...’
‘그래, 그래.’
잠시 얹혔던 손이 떨어지고 물 소리가 들리더니 차가운 수건이 이마에 놓였다. 예상치 못한 냉기에 몸을 틀자 아까보다 조금 서늘해진 손이 뺨을 잡았다.
‘가만 있어.’
‘이거 놔… 그리고 안 죽을 거니까 나가버려요.’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한결같군.’
‘안 죽는다니까...’
그것도 고작 감기몸살로. 자신이 침대 위에서 편하게 죽을 리 없다고 웅얼거리자 라이가 멈칫하고 이불을 여매주었다.
‘어차피 안 어울리는 짓 하는 김에,’
라이가 이불 위를 토닥였다. 뭐 하는 거냐고, 덕분에 나을 병도 안 낫겠다며 궁시렁대려다 버본은 밀려오는 수마睡魔에 까무라쳤다.
“……!”
“이런, 깨셨습니까.”
아무로는 거칠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머리맡에 앉은 오키야 스바루가 이불을 덮어주려 하고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아무로는 곧 한 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어지럼증은 덜했지만,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머리가 울렸다.
“이제야 자정입니다. 좀 더 누워계세요.”
“자정이라고요?”
포와로에서 떠난 것이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공간에서 다섯 시간도 넘게 잠들어 있다니, 평소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아무로가 벙찐 채로 앉아있자 오키야가 손을 뻗었다.
한 번은 당했지만 두 번째는 아니었다. 아무로가 오키야의 손을 제지하자 오키야가 부드럽게 웃었다.
“열을 재는 것 뿐이예요.”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아무로는 잠시 망설이다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다른 한 손으로 오키야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방금 전 꿈에 나타난 라이, 아카이 슈이치의 미적지근한 체온이 생각나 금방 손을 떼었다.
“그렇게 해서 알겠어요? 실례.”
크고 마디가 긴 손이 아무로의 이마를 덮었다. 따끈한 밀빛의 머리를 헤집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멍하니 있던 아무로는 눈을 크게 떴다.
도무지 긁어낼 수 없는 이 미온微溫을, 알고 있다.
“아까보다 내리긴 했지만, 아직 열이 좀 남아있네요.”
“…사람을 돌보는 일에 능숙하신가봐요.”
“나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 있어서요.”
“하하.”
아무로는 조용히 웃었다. 오키야가 의아한듯 안경을 치켜올렸다. 아무로가 잠잠히 말을 이었다.
“특정 사실을 강조하고 다른 것들을 감추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그게 전부인 줄 믿는다고 하죠.”
“대외적인 정보를 통제한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어빙 고프만이었던가요.”
“공학도시라고 들었는데요.”
“교양 수업은 필수니까요. 그래서, 갑자기 인상 관리론impression management 은 왜?”
아무로는 오키야 스바루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몇 가지 특징적인 사실만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는 걸로 그 사람의 정체를 믿게 하는 것이 가능하단 거죠. 예를 들어 당신처럼, 대학원생이다, 공학 전공이다,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고 요리에 서툴다... 같은.”
“그렇군요... 하지만 그건 당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아무로 토오루 씨?”
오키야 스바루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로가 숨을 죽였다.
“...고프만의 이론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수수께끼 뒤에 숨겨진 진정한 비밀은 실제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라고, 그도 말했으니까요.”
아무로 토오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롱인가, 경고인가. 피차일반, 그의 말버릇으로는 피프티 피프티. 너의 비밀을 묵인할테니 나의 그것 또한 더이상 찾지 말라는 거래의 제안인가. 이제는 어째서 오키야 스바루를 따라 쿠도 저택에 들어왔는지조차 희미해졌다. 아무로는 시선을 떨구었다. 오키야의 미지근한 손끝이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요기를 좀 하시겠어요? 스튜가 있습니다만.”
“수면제가 든 스튜라면 사양하죠.”
“그럴 리가요. 저도 먹었는데.”
“수면제를 바른 식기도 사양입니다.”
생글 웃는 오키야 스바루에게 아무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방에 자신의 발로 걸어 들어온 기억은 없다. 홍차는 오키야도 마셨고 위스키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 남은 건 찻잔을 비롯한 식기였다.
“마음 같아선 바로 떠나고 싶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오키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로의 눈이 그를 좇았다.
“아가사 박사님 댁에서 자료 정리를 도와드리기로 했던지라. 내일이 되어서야 돌아올 것 같으니 편히 주무세요. 대문은 자동으로 잠기니 열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깐,”
오키야는 붙잡는 아무로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방을 떠났다. 시계는 자정에서 두 칸 정도 빗겨나 있었고,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렸다. 현관문에 이어 대문마저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로는 오키야가 앉아있던 스툴을 손으로 쓸다 주먹으로 내리쳤다.
“…젠장.”
떨쳐내기엔 뜨겁지 않고, 끌어안기엔 서늘한 미온이 손끝을 선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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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ving Goffman 저,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 (1959) 의 부분을 번역, 인용 및 언급하였습니다.
“…an idealized impression is offered by accentuating certain facts and concealing others; expressive coherence is maintained by the performer taking more care to guard against minor disharmonies than the stated purpose of the performance”
“…이상적 인상은 특정 사실을 강조하고 나머지를 숨김으로써 공급된다. 표현적 일관성은 수행자가 행위의 목적보다 자잘한 부조화를 경계하는 것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것으로 유지된다.”
“Failure to regulate the information acquired by the audience involves possible disruption of the projected definition of the situation”
“관객이 취득하는 정보를 통제하는 것의 실패는 상황의 예정된 정의를 분열하는 가능성을 연루시킨다.”
“As countless folk tales and initiation rites show, often the real secret behind the mystery is that there really is no mystery; the real problem is to prevent the audience from learning this too.”
“무수한 전래 동화와 성년 의식이 보여주듯, 종종 수수께끼 뒤에 숨겨진 진정한 비밀은 실제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